보도자료

『진루셴 회고록 - 죽을 고비에서 다시 살아나다 1916~1982』 간행

 

책 소개

 

『진루셴(金魯賢) 회고록』은 1955년 중국 공산당에 체포되어 18년간 옥고를 치르고, 9년의 노동개조형을 거쳐 1982년에 석방된 중국 천주교 애국회 소속 진루셴 주교의 회고록이다. 종교의 자유가 허락되지 않은 중국에서 겪어야 했던 고초와 바티칸과 얽힌 복잡다단한 중국 천주교 관계를 해결하고자 나름대로 노력한 진루셴 주교의 발자취는 여전히 감동으로 다가온다. 이 책에는 진루셴 주교가 제시하고 있는 중국 천주교 문제를 해결하는 해법이 담겨 있고, 독자들이 교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게 해줄 뿐만 아니라, 진루셴 주교가 겪은 삶에 대한 뜨거운 감동과 신선한 체험은 독자로 하여금 살아있는 신앙인이 되게 해줄 것이다.

 

 

차례

 

일러두기 

역자 서문 

머리말 

제1부 가정

제2부 가정을 떠나 신학교로

제3부 유학

제4부 귀국

제5부 옥중 생활

부록 | 진루셴 주교 연보 및 진루셴 주교 선종시 상하이교구 현황

색인 

 

 

지은이와 옮긴이 소개

 

지은이 : 진루셴(金魯賢)

1916년 5월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예수성심신학교(소신학교)와 성모성심신학교(대신학교)에 들어갔으며, 22살 때인 1938년 예수회에 입회하여 1940년 9월 첫 허원을 하였다. 1945년 5월 사제 서품을 받고 이듬해 쑤베이(蘇北) 둥타이(東臺) 본당 신부로 부임하였으며, 1947년 프랑스 유학을 떠나 1950년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 신학박사 학위 취득 후 귀국하였다. 1955년 9월 상하이 공안국에 의해 30여 명의 신부와 천주교 신자 183명과 함께 체포되었고, 18년간 옥고와 9년간의 노동개조형 등 27년간의 형량을 채우고 1982년 6월 석방되어 상하이 서산(佘山)신학교 초대 원장이 되었다. 2004년 교황청 인가를 받아 공식적으로 상하이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중국 정부의 간섭과 마찰 속에서 중국 천주교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가 2013년 4월 27일 9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옮긴이 : 신의식

중국 남경대학을 수료한 역사학 박사로,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동아시아경제연구원 연구위원·가톨릭신문사 중국주재 기자, 서강대·중국 남경대학·한양대·한성대·단국대·남서울대·충북대·충청북도 공무원연수원 등에서 강사와 중국 길림동화대학 객좌교수를 역임하였다. 현재 충북보건과학대학교 교수, 충청북도 명예대사, 아시아천주교사연구회 회장으로 있다.

대표 논문으로 「民國時期政府의 釐金政策 및 裁釐加稅問題」, 「列强의 中國經濟 侵略의 産物: 子口稅」, 「曾國藩의 西敎認識」, 「강희제와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로마 교황청의 만주국 승인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 「만주국과 천주교회」, 「한국천주교 활판 인쇄와 인쇄 장소에 관한 연구」, 「한·중 천주교 선구자 정약종(丁若鍾)과 서광계(徐光啓) 비교 연구」, 「번수의(樊守義)의 『신견록』(身見錄)―최초의 한문(漢文) 유럽 여행기」 등이 있고, 대표 저·역서로는 『중국어 어법』, 『중국천주교사』, 『연령성월』, 『성모성월』, 『上海近代史』, 『상해현대사』, 『중국 문화와 천주교회사』, 『효과적인 인간관계를 위한 협력적 의사소통』 등이 있다.

 

 

책 속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열 살 때부터 힘든 일을 겪기 시작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누나가 죽어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으면서 마치 씻어낸 듯 가난해졌다. 장년에 들어서는 자유까지도 잃었는데 이러한 기간이 10,000일이나 되었고, 고희가 가까워졌을 때에서야 비로소 성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나에 대한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비방이 만천하에 가득했었지만, 나는 입이 있었음에도 변론조차 하지 못했다. 옛사람들은 염량세태(炎涼世態)라는 말이 무섭다고들 했는데, 내가 느낀 것은 훨씬 더 심했다. (머리말 중에서)

 

세상의 모든 것이 공허하다고 확신하면서 왜 회고록을 쓰는가? 최근 해외에서 나에 관한 글이 많이 써져 널리 퍼졌는데 사실과 다른 내용이 대부분이고, 일부 내용은 모두 날조되고, 일부는 고의로 비방하는 내용이다. 그것은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지만 중국교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신성한 영적 사업에는 이롭지 못하다. 만약 내가 제대로 밝히지 않는다면 외국 사람들은 앞으로 그것을 진실로 믿게 될 것이고 많은 내적 갈등을 겪을 것이다. 독자들에게 이 시기의 역사적 사실을 조금은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 회고록 집필을 결정하였다. (머리말 중에서)

 

어렸을 때 가난했고, 청년 때에는 좌절과 여러 어려움을 겪었으며, 너무나 빈곤한 생활을 했던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또 하나의 천주의 강복이라 생각하며 깊이 감사하고 있다. 이로써 나에게 동정심이 생겼고,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또 가난한 사람을 도와줄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가난한 친구를 사귈 생각을 갖게 했다. 인생에서 어려움을 겪는 과정은 비록 아프고 힘들지만, 사람들에게 아주 많은 것들을 제대로 보게 해준다. (76쪽)

 

1950년 5월에 나는 상하이 라크레텔르(Fernand Lacretelle, 중국명 格壽平) 중국 예수회 회장으로부터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귀국하라는 편지를 받았다. 국내에서는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외국에 있는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하라고 하여 또 한번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 나는 포교성 차관을 만나러 갔는데, 당시 차관으로 코스탄티니(剛恒毅) 대주교가 재임하고 있었다. 그는 중국과 중국교회를 열렬히 사랑하는 초대 중국주재 교황대표로 나는 그를 매우 존경한다. … 그가 예수회 책임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어 상하이 회장이 서신으로 내가 돌아오기를 희망했다고 대답하자, 대주교는 좀 생각한 후에 “그럼 당신은 돌아가시오! 하느님께서 당신께 복을 내리시기를 빕니다.”라고 말했다. (251~252쪽)

 

나는 한 평범한 사람인데, 평범하지 않게 반생을 살았다. 1938년 스스로 원해 예수회에 들어갔고, 나는 예수회를 사랑한다. 예수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단히 큰 공헌을 했다. 나는 훌륭한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했고, 스스로 한 장의 벽돌이 되고자 했으며, 예수회가 가라는 곳은 어디라도 가서 그 뜻을 따랐고, 큰 교회라는 건물의 작은 일부분이라는 압력도 견디어 냈으며, 초학 2년 동안의 아주 큰 고통도 이겨냈다. 이후에도 예수회에서는 여러 차례 나를 위험천만한 곳으로 보냈지만 나는 두말하지 않고 즉각 부임했으며, 전력을 다해 어떻게 하면 업무를 잘할까만을 생각했다.

27년 동안 교도소에서 나는 매일 마음속으로 ‘예수회는 나의 어머니’라고 노래 부르며 전 세계 예수회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고 깊게 믿었으므로 안위와 힘을 얻었다. (435쪽)

 

 

배포일 : 2023년 8월 23일